누군가를 기억하거나, 혹은 누군가에게 나를 기억하게 하는데 가장 우아하고 효과적인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향수”인데요, 적당하고 좋은 향기는 좋은 인상을 만들 뿐만 아니라 당시의 추억과 이야기를 함께 각인시키고 다시 떠오르게 만드는 효과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스스로를 "향기 스토리 텔러"라고 표현하는 조향사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만든 브랜드, 조 말론 런던(Jo Malone London)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브랜드의 시작
조 말론(Jo Malone)은 화가인 아버지와 피부 미용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납니다.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의 일을 도와 드리며 미용 산업과 친숙했던 아이는 성인이 되어 피부 관리사로 일하게 됩니다. 본격적으로 피부 관리일을 하던 시기에 관리숍의 단골 고객들에게 선물하려고 개발한 "nutmeg and ginger bath-oil"이 입소문을 타면서 상류층 인사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합니다.
이때 조 말론(Jo Malone)은 고객들이 유독 Bath-Oil의 향기에 열광하는 것을 지켜보며 자신의 후각적 재능과 향기에 대한 감각이 남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이 경험이 계기가 되어 늘 마음속에 간직하던 향기에 대한 열정을 꽃피우기 위해 피부 관리숍을 정리하고 조향사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1994년 런던에 자신의 이름을 내건 첫 향수 매장을 오픈하게 됩니다.
브랜드의 성장과 차별화 전략
지금은 비교적 대중화되고 많이 알려졌지만 론칭 초기 조 말론 런던의 컬렉션들은 “니치 향수”의 전형을 보여주는 브랜드였습니다. 최고의 조향사가 최상의 재료로, 소수의 취향을 고려해 만드는 프리미엄 향수를 "니치 향수(Niche Perfume)"라고 하는데요, 주로 대량 생산이나 대중성보다는 브랜드만의 철학과 정체성이 분명하고 희소성 있는 고가의 향수를 지칭합니다.
피부관리사 시절 경험으로 상류층의 취향에 익숙했던 조 말론은 향을 읽고 조합하는 천부적인 재능을 활용해 독특하고 정체성이 분명한 향수들을 출시하면서 소수의 영국 상류층 뿐만 아니라 대중적으로 사랑받는 브랜드로 성장합니다.
1. 새로운 시도와 단순함을 통한 차별화
론칭 당시 조 말론 런던의 향수가 특별했던 이유는 "새로움"과 “단순함”이었다고 말합니다. 피부관리사 시절의 경험으로 상류층의 감성을 잘 알고 있던 조 말론은 그들에게 어필하기 위해 기존 향수와 어떤 부분이 달라야 할지, 그리고 달라진 부분을 어떻게 채워야 할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타고난 후각 재능과 감각을 활용해 향수에는 잘 사용하지 않던 새로운 원료를 활용하고, 향을 배합하는 방식도 기존의 다른 향수와 다르게 한 두 가지 노트로 단순하게 만들면서 차별화된 향수를 선보였습니다.
2. 선택과 집중을 통한 정체성 확립
초기 조 말론 런던은 향을 기반으로 탄생한 브랜드답게 확장 과정에서도 출발 당시의 정체성과 중심을 잃지 않습니다. 몇몇 시그니처 향기로 구성된 향수 컬렉션을 따라 파생 제품을 출시하지만, 디퓨저, 향초, 바디나 헤어 제품처럼 매력적인 향기가 극대화될 수 있는 제품 위주로 선보이면서 브랜드의 정체성이 희석되지 않도록 노력합니다.
3. 브랜드의 상징이 된 패키지 디자인
차별화된 향기와 더불어 조 말론 런던을 대표하는 또 하나의 상징은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패키지 디자인입니다. 크림 컬러의 쇼핑백과 선물 상자, 그리고 블랙 리본으로 마무리되는 이 패키지 디자인은 티파니의 "티파니 블루 박스"처럼 멀리서 얼핏 보더라도 조 말론 런던을 연상시키는 시그니처로 자리 잡았습니다.
조 말론은 브랜드의 시각적 자산을 마케팅에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던 사업가였습니다. 브랜드가 뉴욕에 진출할 당시 홍보 예산이 부족했던 조 말론은 자신의 브랜드를 알리기 위해 이 패키지 디자인을 활용합니다.
방법은 단순했습니다. 뉴욕에 살고 있는 지인들을 총동원해 그들에게 쇼핑백을 나누어주고 집을 나설 때면 항상 잘 보이게 들고 뉴욕의 번화가 거리를 돌아다녀 달라고 부탁한 겁니다. 지인들을 움직이는 광고매체로 활용하려던 이 전략은 성공적이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복잡하고 트렌디한 도시에서 쇼핑백만으로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해 주의를 끌면서 브랜드를 알리게 되었고, 나아가 고급 백화점 브랜드인 버그도프 굿맨(Bergdorf Goodman) 관계자의 눈에 띄면서 백화점에 입점하고 뉴욕 진출에 성공하게 됩니다.
브랜드의 전환과 새로운 시작
빠르게 성장하며 브랜드를 확장하던 조 말론 런던은 1999년, 론칭 5년 만에 대기업 에스티로더(Estee Lauder)에 매각됩니다. 구체적인 금액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사업의 규모나 역사에 비해 상당히 큰 금액으로 거래됐다고 전해집니다.
매각 이후 대기업의 자본력과 인프라를 바탕으로 고객층을 확대하면서 좀 더 대중성을 갖춘 브랜드로 성장합니다. 당시 조 말론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활동하며 한 동안 브랜드 운영에 참여했지만, 2003년 유방암 진단을 받으면서 향후 5년간 동종 업계에서 일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잔여 지분을 모두 매각하고 브랜드를 완전히 떠나게 됩니다.
창립자이자 브랜드의 본질이었던 조향사 조 말론은 떠났지만, 브랜드 조 말론 런던은 여전히 건재하고 프리미엄 니치 향수로 자리 잡아 꾸준히 사랑받고 있습니다.
천재 조향사 조 말론(Joanne Lesley Malone)
사람의 감각은 상대적이어서 특정 감각의 기능이 부족하면 다른 감각의 기능이 뛰어나게 발달하는 경우가 있다고 하는데요, 어린 시절난독증이 있던 조 말론(Jo Malone)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조 말론은 난독증으로 인해 읽고 쓰는 방식 대신 "향기"로 사물을 인지하고 기억하는 습관이 생겼고, 언제나 향기에 지배받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인생에서 가장 절망적이었던 순간도 정성 들여 키워낸 분신 같은 브랜드를 떠나는 일이나 암을 진단받아 시한부를 선고받은 상황이 아니라, 항암 치료로 인해 후각을 잃게 되었던 시기라고 말합니다. 천재 조향사의 후각과 향기에 대한 감각이 왜 그렇게 특별했는지 설명되는 부분입니다.
현재 조 말론은 암을 완전히 극복하고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향기로 이야기를 전하는 일"에 복귀했고, 2011년에는 새로운 브랜드 조 러브스(Jo Loves)를 론칭해 또 다른 향기로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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